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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_해외 문학

[고전/비교문학]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 그리고 울리츠카야의 스페이드여왕 (줄거리/감상)

by 삐와이 2020. 8. 3.

 

 

< 작품 정보 >

 

- 제목 :
스페이드여왕(푸슈킨), 스페이드의 여왕(울리츠카야)


- 작가 : 푸슈킨,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 줄거리(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_인터넷 교보문고 책소개 참고)

: 게르만은 노름을 좋아하지만 돈을 잃는 것이 싫어 노름판에서는 언제나 구경꾼으로만 참여하고 있다. 어느 날 게르만은 언제나 꼭 이기는 석 장의 카드패를 알고 있다는 늙은 백작부인의 말에 솔깃해진다. 백작부인의 피후견인인 리자에게 거짓 사랑을 고백하여 백작부인 방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는데…….


<줄거리, 감상, 서평, 작품 비교>

 

※ 푸슈킨의 스페이드여왕, 그리고 울리츠카야의 스페이드여왕을 읽고 두 작품을 비교하며 쓴 느낀점입니다. 두 작품에 대한 줄거리가 상세히 적혀있으니 읽을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책을 먼저 읽고 저의 감상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푸슈킨의 스페이드여왕(Пиковая Дама)은 19세기에 쓰여진 짤막한 단편소설이다. 푸슈킨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차이콥스키는 오페라를 만들기도 했는데, 얼마 전 블로그를 통해 소개한 20세기 러시아 여성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도 푸슈킨의 스페이드여왕에 영감을 받아 동명의 단편을 발표했다.(단편소설은 국내에는 [소네치카]로 통칭한 단편집 안에 들어있다.) 워낙에 짧은 단편이라 최근에 다시 읽어보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이 두작품을 비교하며 느낀점을 정리해보려 한다.


   원작 푸슈킨(외국이름이다보니 푸쉬킨, 뿌쉬낀 등 국내에서는 다양하게 표기된다.)의 [스페이드 여왕]의 줄거리는 대략적으로 이러하다.

   18세기 러시아사회에서 도박은 귀족 문화의 일부로 정당한 스포츠, 놀이로 인식되고 있었다. 독일계 러시아 장교 게르만은 마음속에서는 도박,돈에 대해 타오르는 욕망이 있었지만 단 한번도 도박놀음에 참여하지 않고 급료로만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도박판에서 톰스키가 본인의 할머니인 백작부인이 도박의 비기(秘記)를 알고있고 그녀로부터 카드 3장을 전수받으면 반드시 도박에서 이길 수 있을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 날 이후 백작부인의 저택을 서성이던 게르만은 백작부인의 양녀 리자를 사랑하는 척 가장해 백작부인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는다. 백작부인이 혼자 있을 때 성으로 진입한 게르만은 백작부인을 장전되지 않은 총으로 협박하며 카드 세장을 알려달라고 하고 이미 고령이었던 백작부인은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즉사하고 만다.

 

   백작부인의 장례식에서 게르만은 백작부인의 시신이 본인에게 윙크를 한다고 착각해 쓰러지고, 그날 밤 게르만에게 찾아온 백작부인의 귀신은 3, 7, 1 3장의 카드와 하루에 한번만 도박을 해야한다는 규칙을 알려준다. 그녀가 알려준 규칙대로 1,2번째 도박판에서 큰 돈을 모은 게르만은 마지막 카드판에서도 1에 도박을 걸지만 그가 마주한 카드는 '스페이드의 여왕'. 카드에 그려진 '스페이드의 여왕'은 게르만에게 윙크를 하고, 게르만은 그 순간 미쳐버린다.


    큰 틀에서 두 [스페이드 여왕]에서 유사성을 지니는 인물구도는 '백작부인과 리자', '무르와 안나'이다.

단, 이 인물들의 관계를 자세히 파고들면 중심이 되는 무르와 백작부인의 차이가 보인다. 푸슈킨의 '백작부인'은 무도회장에 다녀와 기괴한 치장들을 다 벗어던지고 보잘것없는 몸뚱이만 남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게르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심술궂지만 어딘가 가여운 노파의 모습이 연상된다.

 

   하지만 무르는 그야말로 더 기괴스럽고 더 악마적인데, 심지어 그녀는 등장할 때 부터 내게 작은 쇼크를 선사하기도 했다. 무르와 안나의 첫 대면은 강압적인 남편과 구박받는 아내의 모습을 연상시켜 무르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무르가 안나에게 불러일으킨 두서 없는 공포감도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쨌든 내가 원하는 대로 될거야'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현실에서 끝나지 않을 지옥같은 삶의 일면으로 보여, 그녀를 '현실에 존재하는 끝없는 악'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주인공 안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면 푸슈킨의 소설과의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안나는 얼핏 보기에는 리자와 흡사해 보이지만 리자가 양녀로서 백작 부인의 지시에 별 불만을 표시하지 않으며 수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반해, 안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음’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인해 깊은 절망을 느끼는 인물로 겉으로는 무르의 지시에 순종적이지만 속으로는 어머니를 의자로 내리치고 싶었던 충동, 머리끄덩이를 잡고 싶었던 충동을 가졌던 인물이다.

 

   겉으로는 순응적으로 보이지만 그녀를 지옥 같은 삶에서 구해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는 리자에 비하면 삶에 진절머리를 느끼지만 그녀의 의지대로 수난자의 삶을 자처하는 안나의 모습은 더 현실적이고 입체적이다. 심지어 그녀가 무르에게 느끼는 폭력적인 상상 속의 반항(의자로 내려치고 싶었던 충동과 같은)이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에는 그녀가 겪었을 고통이 더 생생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머니를 부양할 것을 선택(이 경우 순응은 가장 주체적이면서도 숭고한 결정이된다.)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오늘날 더 와 닿는 성자, 성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이러한 입체성은 푸슈킨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인물상의 모습을 그녀가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수난자의 모습은 리자에게서, 그녀 인생에서 단 한번의 반항, 자식들을 그리스로 보내는 도박을 저지르는 인물이자, 독일인 아버지라는 뿌리를 가졌다는 점은 게르만에게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작부인의 이름(안나 페도또브나)이 그녀 안나 표도로브나의 이름과 닮았다는 점에서는 그녀 자신이 백작부인의 현현화로 여겨지는 어머니 ‘무르’의 어떤 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남성과의 진지한 관계를 즐기지 않았던 무르가 안나를 가졌던 것이 하나의 미스터리듯, 역으로 남성과의 성적인 관계에 역겨움을 느끼는 안나가 카차를 가진 것이 의문스러운 점등 무르의 역사가 안나에게 되풀이 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울리츠카야의 소설이 뿌쉬낀의 텍스트를 기저 텍스트로 삼고 있으나 제2의 뿌쉬낀이 되기보다는 제1의 울리츠카야가 되는 길을 선택했기에 그녀의 작품은 더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기존의 남성 주인공을 여성 주인공으로 변형시키면서 동시에 그 여성들에게 남성적 이미지와 여성 이미지를 동시에 가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숨결을 불어넣었다. 때문에 뿌쉬낀의 인물들이 다소 전형적인 인물상으로 우리에게 작품 속 인물들이라는 거리감을 가질 수 있게 했던 데 비해, 울리츠카야의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은 주인공들의 삶을 오늘날, 우리 곁으로 끌고 들어온다. 리자가 무도회로 이동하는 마차 속에서 ‘이게 내 삶이야’라고 말하는 독백이, 카챠에게 말하는 안나의 ‘아니야, 이게 (우리의) 삶이란다.’의 목소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오페라의 유령을 영화로 보고 뮤지컬로 보면서 동일한 컨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감상과 느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렇게 한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제2의 소설을 자기 식으로 풀어가는 소설을 읽어나가는 경험도 충분히 흥미로운 독서방법이 될 수 있구나를 느꼈다. 흔히 속편이 오리지널보다 좋기는 어렵다. 형보다 나은 아우없다는 얘기가 많은데, 훌륭한 고전을 자기식으로 재해석해 또 훌륭한 단편을 만들어낸 울리츠카야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워낙 짧은 단편이기도 하고, 두 작품을 연이어 읽어도 술술 읽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같이 읽어보고 비교해보는 기회를 가지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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