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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_비문학

[교양/인문 잡지] 에픽(Epiic)#02 디스토피아 세계에 대한 픽션, 논픽션 모음 서평/책 속 구절/감상

by 삐와이 2021. 1. 9.

 

에픽2 표지(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 작품 정보 >

 

- 제목 : 에픽(Epiic)#02

- 출판사 : 다산북스

- 출간일 : 2021.01.04


< 책 소개 및 짧은 감상 >

 

다산북스에서 펴낸 에픽(Epiic)은 '나와 네가 만나는 곳에서, 문학과 문학이 만나는 곳에서, 논픽션과 픽션이 만나는 곳에서 새롭게 태어난 매거진'이다.

 

올해 1월 출간된 에픽#02는 2번째 매거진으로 이번 호의 주제는 '멋진 신세계'이다.

 

책의 가장 앞장에는 이번 호의 주제인 '멋진 신세계'를 소개하는 편집위원의 글이 짧게 실려있다. 그 글은 이 책을 접하는 모든 이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 같다. 편집위원의 글 중 일부를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해 잠시 빌어온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제목 자체로 지독한 역설이다. 그럼에도 ‘멋진 신세계’라는 말을 발음할 때마다 어떤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맞이한 ‘뉴노멀(신세계)’은 전혀 멋지다고 할 수 없지만, 전염병의 공포에 맞서면서도 일상을 가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때때로 경탄한 한 해였다. 2020년의 디스토피아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낸 모든 이들이 2021년에는 저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멋진 신세계’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이 구절을 다시 읽는데,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묘한 감정의 집합체가 바로 책의 첫장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놀라움을 느꼈다. 이 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사회의 각종 이면들을 조명하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고 또 답답하기까지 할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는 책을 읽은 감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이 속에서 감추고 싶은 우리 자신, 혹은 이웃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때로는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또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옅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것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고전이 된 이유이자,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이야기들이 지닌 힘일지도 모르겠다. 

 

여느 패션잡지와 다를바 없이 이 잡지의 구성은 아름답다. (이미지 출처 : 다산북스 에픽#02)

 

이 책을 설명하는데는 이 책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구성도 빠뜨릴 수 없다. 여느 패션잡지와 다를바 없이 다산북스에서 펴낸 문학잡지 에픽은 잡지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각 이야기들을 연결하는 부분마다 아름다운 디자인의 표지가 등장하고, 또 잡지의 커버스토리인 'i+i'는 실제로 예술제본공방 '렉또베르쏘'의 작업 사진들이 실려있기도 하다. 

읽을거리 뿐만 아니라 볼거리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는 문학 잡지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도 잘 묻어난다.

 

책의 구성은 크게 3파트로 나뉘어지는데 크리에이티브 논픽션 파트, 그리고 에세이와 리뷰가 실린 2번째 파트, 마지막으로 픽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파트는 말 그대로 각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의 삶과 생각이 묻어나는 에세이라고 본다면 2번째 파트는 논픽션과 픽션 도서를 엮어 소개한 1+1리뷰, 그리고 버추얼 에세이가 실려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오가는 독특한 유형의 글들이 실려있다. 마지막 파트는 좀 더 익숙한 김솔, 김홍, 송시우, 이주란, 황정은 작가의 짧은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평소 소설에 좀 더 친숙함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파트3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잡지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엇보다 책 자체가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시간을 내서 읽어나가기보다는 짬이 날때마다 한편씩 한편씩 읽어보는 것도 좀 더 각 이야기들의 세계에 빠져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책 속 구절, 짧은 감상 >

 

*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작가이자 의사인 '남궁인'님이 쓴 [응급실의 노동자들], 그리고 송시우 작가의 [프롬 제네바], 황정은 작가의 [기담]이었다. 각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과 짧은 감상을 담아본다.

(책의 구절을 옮기다보니 스포일러가 되는 구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책을 온전히 즐기고 싶은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세요!)

 

우리의 식사 시간은 언제나 일정치 않다. 여유가 생기면 빠르게 밥을 먹어야 한다 나는 응급실 의사가 되고 15분 넘게 밥을 먹어본 일이 없다. (중략)급하게 식당에서 돌아오자 절박하게 우는 한 살 아이가 있었다. (중략)그 바로 앞자리는 책임 간호사의 자리였다. 역시 15분 만에 밥을 먹고 돌아와 푸른 옷을 입고 각종 환자의 넋두리와 비명을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 99p [응급실의 노동자들 中]

 

손가락이 잘렸다는 사람이 왔는데 조각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중략)바깥의 야간 원무과에 가보았다. 진료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접수하려고 줄을 서서 웅성이고 있었다. "15만 6천 7백원입니다"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110p [응급실의 노동자들 中]

 

응급실의 불은 꺼질 수 없다. 언제나 등대처럼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려야 한다. 다급하게 찾아온 수많은 환자는 이곳을 떠나 안락한 집으로 가거나 가끔 다른 세상으로 영영 떠나버리지만, 이곳을 일터로 삼은 사람들은 힘이 닿을 때까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영원히 순환하는 세계와 이 안에서 치유되는 사람들을 위해 -123p  [응급실의 노동자들 中]

 

'응급한 상황'은 상상하기만 해도 손이 벌벌 떨리고, 인생의 트라우마로까지 남을 수 있을 일들인데 그 일을 매일 겪는 사람들을 글로 접하게 되니 생소하면서도 놀라웠다. 그들이 그 직업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이 어떻게 채워지고 있는지. 또 역으로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상적인 것과 일상적이지 않은 것.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이 만나는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일상을 살아가는데 문득 문득 떠오르며 나를 부끄럽게하고 또 일으키게 될 것도 같다.


 

에픽2 프롬제네바 중
"뭐, 쉽게 말하자면 그렇죠. 나이키 사건 아세요? 1990년대에 한 파키스탄 소년이 눈이 멀도록 나이키 축구공을 꿰매고 있는 사진이 잡지에 실리면서요, 대대적인 나이키 불매운동이 일어났죠. 나이키는 경영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어요. 인권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면 기업의 이윤도 추구할 수 없다는 걸 일깨운 상징적 사건이 됐죠." - 232p  [프롬제네바 中]

 

 

"대형 초국적기업끼리 연합해서 공급자 책임을 지겠다는 건데..."지훈이 살짝 코웃음을 쳤다."결국 지 자랑이에요, 지 자랑. 회사 자랑. 여기에 기업 관계자 나오면 자기 회사 자랑밖에 안 하죠. 윤리를 방패 삼은 회사 홍보랄까. 어쩌면 그게 기업과 인권의 본질이긴 하지만요." - 242p  [프롬제네바 中] 

신라이따이한. 1990년대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한국 남자들의 저열한 성 의식이 만들어낸 버려진 아이들. 귀국과 동시에 현지처와 자녀를 버리는 데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던 무역 전사가 성공한 기업인이 되어 국제회의에서 기업의 윤리를 부르짖었다. - 268p [프롬제네바 中]

 

인권과 살인사건 미스테리를 적절히 섞어 모두가 편하게 읽을 수 있게 구성한 단편소설 프롬제네바. 특정 기업이 떠오르고, 또 결말이 다소 예측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 잡지 속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편하고 쉽고 재밌게 읽었던 디스토피아 이야기.


세입자나 자가 거주자나, 공용 계단에서 사람이 다쳤으니 미끄럼방지 공사를 해야한다는 선인의 말에 별 관심이 없었다.

넘어졌다고요?

그래서요?

우린 넘어진 적이 없는데.

여태 괜찮았어, 넘어진 사람이 없어.

우린 세입자라서. 여기 집주인이랑 연락해보세요.

그거 뭐 누가하겠어요?

조심해서 다니면 되지, 조심해요 -314p [기담 中]

 

아이가 많이 뛴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저도 아이를 혼내고는 있는데요, 그래도 생각을 좀 해주셨으면 하는게요...이 이상 아이를 컨트롤하려면 때리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뭐라고요?

제가 아이를 때리는 수밖에 없어요.

(중략)

윗집 싫어.

그래.

나쁘다.

그래.

나빠.

(중략)

저 사람들에겐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야.

선인이 강희에게 씁쓸하게 말했다. 나쁜 쪽이 그들이었따. 야밤에 벨을 눌러 자기 식구를 괴롭힌 이웃, 아이를 혼내게 하고 부당하게 울게 만드는, 고약한 이웃. -321~2p  [기담 中]

 

내가 느끼는 우리사회는 바로 '기담' 그자체이다. 정작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는데,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할 당사자는 우리가 아닌데 우리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리거나 이슈 그자체를 두고 편가르기를 해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곤 한다. 가끔은 '보이지 않는 손'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편가르기를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지칭하는데 쓰여야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모두가 나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인상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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