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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_해외 문학

[독서 감상] 톨스토이_크로이체르 소나타 (작품소개, 줄거리, 서평, 리뷰)

by 삐와이 2020. 7. 20.

 

펭귄클래식 책표지(이미지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작품 정보>

 

- 제목 : 크로이체르 소나타

- 작가 : 레프 톨스토이

- 줄거리 (인터넷 교보문고) :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모음집 [크로이체르 소나타]안에는 사랑에 대한 4편의 소설이 담겨있다. 그 작품들을 통해 톨스토이는 이상적 사랑과 성적 갈망, 정욕, 동경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묘사하였다.

 

특히 소설집의 제목으로 채택된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노골적인 내용으로 출간 당시 금지소설로 분류되기도 한 중편소설로, 기차의 한 객실에서 사랑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그 논쟁에 대해 주인공이 섹스의 추악함, 아내에 대한 의심과 그로 인해 발생한 살인을 고백하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 감상 : 왜 하필 너는 화가가 아닌 바이올리스트였나... >

 

※ 스포일러를 목적으로 하고 쓴 글은 아니지만, 감상문 중간에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나, 주요 주인공들의 대사를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아내를 살해한 주범은 바로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였노라고 고백하는 포즈드니셰프를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찾아 들었다. 그것도 시끄럽던 세상에 고요함이 깔리고 감성이 충만해지는 순간이라는 새벽시간에. 음악을 듣고 난 다음에야 그가 살해의 원인으로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꼽고, 또 여전히 분노에 차서 그 음악을 무시무시하다고 평가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즈드니셰프와 생각이 조금이라도 닿아있는 바로 그 순간이 글을 쓰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일 것 같아서 바로 글을 쓰려했지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음악 안에서 반복되는 프레스토가 마치 나를 ‘출발시간이 촉박한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으로 내달리는 기차 안’으로 몰아넣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수많은 생각들도 그가 아내를 살해하러가는 기차 안에서 그랬듯이 가라앉지 않고 끊임없이 내 머리 속에서 정신없이 서성거렸다.

 

 

  여기서 나는 이 작품의 이름이 [바람난 아내]도 아니고, [나는 아내를 죽였다]도 아닌 [크로이체르 소나타]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작가는 ‘크로이체르 소나타’보다 더 자극적이고, 혼란스러운 격정을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발견하지는 못했으리라. 사실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작품의 제목이라고 말하기 무색할 만큼 그 곡이 연주되는 순간에 대한 묘사는 매우 짧고 단편적이다. 하지만 달리는 기차 안에서 아내와의 8년의 세월을 때로는 프레스토 부분을 연주하듯 빠르게, 때로는 한음 한음을 정확히 눌러 소리를 내는 피아니스트마냥 느리게 들려주는 포즈드니셰프의 모습에서 이미 그가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그만의 방법으로 연주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그가 고백하듯 음악에 의해 그는 이성이 마비되고, 영혼은 자극을 받아 제 자리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보내진다. 즉, 그는 음악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한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쌓여왔던 수많은 불신과 불만을 틀어막고 있던 안전벨트가 음악으로 인해 풀려버린 것이다. 이는 후에 그가 아내와 트루하쳅스키와의 불륜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하고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

 

  이 때, '아내의 불륜 상대로 의심받는 트루하쳅스키가 왜 하필이면 바이올리스트여야만 했을까? 그가 만일 화가였더라도 포즈드니셰프는 아내를 살해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요즘은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문학, 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 등 수많은 예술 장르들이 얽히고설킨 채 하나의 'story'를 다양한 방법으로 ‘telling’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각 장르만의 독특한 ‘telling’기법이 똑같은 ‘story’를 다르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음악과 미술은 청각과 시각이라는 특정 감각을 자극하는 자신들만의 telling기법을 지니고 있는 예술장르이다. 얼핏 보기에는 감각을 자극하고 감성을 움직이는 두 장르의 차이가 크게 존재할 것 같지 않지만, 여기서 우리는 포즈드니셰프가 살인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트루하쳅스키가 화가였고, 그가 포즈드니셰프의 아내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는 상상을 해보자. 과연 포즈드니셰프의 감정이 음악을 들었을 때처럼 격정적으로 치닫았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음악은 연주되는 그 순간만큼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그 속에는 너와 나의 대화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음악으로 대변되는 너의 외침을 고스란히 듣기만하며, 내가 대답할 권리는 박탈당한다. 때문에 포즈드니셰프는 아내와 트루하쳅스키의 연주의 순간에 그들의 목소리 앞에서 침묵하게 되고 그들의 정신적인 교감을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의 연주 앞에서 그의 이성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다. 실제로 그가 살인에 대한 결심을 한 것은 연주회가 있었던 당일이 아니라 며칠 뒤 출장을 떠난 곳에서 아내를 편지를 받고 그 때의 순간을 재구성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연주하던 때를 뒤늦게 회상하며 ‘음악’의 일방적인 외침에 사로잡힌 그의 이성은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침묵하던 그가 쫓기듯 결정을 내려버리는 것은 음악의 빠른 템포가 지닌 힘에서 기인한 것이다.

 

  반면 미술은 음악에 비해 정적이다. 한 미술 작품 안에는 수만가지의 외침이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목소리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나는 그 작품을 마주한 순간 1대 1로 그 작품의 수많은 외침들과 차례로 마주할 권한을 가진다. 만일 포즈드니셰프가 그림 속 아내를 볼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림 속 아내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면, 광기에 가득 찬 스스로의 내면의 목소리에만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아내를 헤아리는 대화의 순간을 먼저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결국은 아내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고, 단지 임신, 출산, 육아 등을 위한 삶을 사는, 남자를 위한 쾌락의 도구로만 보았던 남편이 결혼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끝내버린 이야기라는 점에서,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등장한 이유는 끊임없이 내면의 소리에 휩싸인 채로 살아가는 포즈드니셰프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트루하쳅스키가 아내의 눈동자를 그려 넣을 수 있는 화가였다면, 혹은 그와 아내의 연주의 템포가 조금만 느렸더라면, 포즈드니셰프는 예술 안에서 아름다웠던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고, 진정한 의미에서 아내와 마주할 수 있지 않았을까.

 

※ 팽귄클래식 [크로이체르 소나타] 중 동명의 단편 소설을 읽고 기록한 개인적인 감상문입니다.
아름답지만 사연이 담긴것 같은 책 표지만큼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톨스토이의 격정적 소설을 여러분께도 추천드리고 싶어요.

댓글이나, 공감으로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시는 것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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